고전경제학에서 바라본 박정희 시대의 경제개발

경제 | 2020.10.27 19:42

고전경제학

철학은 사유할 수 있는 인간만이 가진 특권이며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가장 큰 차이점 가운데 하나다.
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철학은 발전해왔으며 시정잡배의 개똥철학부터 공자나 소크라테스와 같은 현인의 생각을 우리는 모두 철학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그러한 철학은 18세기에 이르러 특이한 학문을 파생하게 되었으니 이름하여 경제학이란 학문의 태동이었다.

<국부론(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

 

애덤 스미스(Adam Smith) 일생의 역작으로 생각한 도덕감정론은 인간 본성의 탐구가 주를 이뤘다면 국부론은 그러한 인간 본성이 미치는 경제적인 측면을 다루고 있다.
철학으로 출발한 일개 보고서였는데 후대 사람들에 의해 경제학의 원론으로 추앙받는 서적이 되었다는것을 본인이 안다면 어떤 기분일지?
그도 그럴것이 국부론은 시장, 분업, 자본, 화폐, 노동, 임금, 지대, 조세, 국가재정같은 현대 경제학의 기본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물론, 이전에도 모든 현상을 경제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학자들이 있었지만(인류 역사상 모든 전쟁의 원인은 결국엔 경제였다) 애덤 스미스는 이를 집대성했다.
모든 부의 원천은 토지에서 파생한 생산물에 기반한다는 사람, 신대륙의 막대한 자원을 사고 파는 것에 기반한다는 사람이 있었지만 당시 태동한 산업혁명의 비약적인 생산성의 증대는 중농주의나 중상주의로 설명이 불가능했다.
애덤 스미스는 생산성의 향상은 인간의 선한 마음이 아닌 이기심에서 찾았으며 시장이 공정할 경우 자유로운 무역으로 국가의 부를 증진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무역은 두 집단(또는 국가)간 재화의 교환으로 이득이 발생할 경우 이뤄진다.
철광석을 수출하는 나라와 수입한 철광석으로 철을 뽑아내는 기술이 발달한 나라가 서로 교역이 이뤄진다면 이보다 좋을 수 없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원자재와 가공품을 생산해서 교역하는게 아닌 기술집약 가공품, 노동집약 가공품을 생산해서 교역한다고 가정해보자.
일찌기 산업이 발달한 나라는 원자재만 공급되면 거의 대부분의 최종 생산물을 산업이 덜 발달한 국가보다 품질과 생산성에서 앞설 가능성이 크다.
거대 자본과 숙련된 노동력, 기계설비에서 절대우위의 간극이 발생하며 이럴 경우 무역은 발생하기 힘들다.
이는 국부론에서 설명하기 힘든 부분이다.

데이비드 리카도(David Ricardo)는 애덤 스미스의 이론에 비교우위의 개념을 적용했다.
애덤 스미스에 의하면 생산성의 증대로 양국간 교역이 발생해 두 국가에 모두 이익이 발생해야 하는데 아쉽지만 일찌기 산업화한 국가가 최종 생산물 모두 월등한 생산력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건 앞서 언급했다.
가령, 1960~70년대 선진국인 일본과 개발도상국인 한국이 자동차와 섬유를 생산해 교역한다고 가정해보자.
절대우위의 측면에서 본다면 일본이 막강한 기술력과 거대자본으로 자동차, 섬유 모두 한국보다 우위에 있어 무역이 발생할 수 없다.
비교우위의 측면에서 본다면 기술력이 중요한 자동차는 일본에서 생산하고, 인건비의 비중이 큰 섬유는 한국에서 생산해 교역하는게 양국에 이득이라는 것이다.
비교우위이론을 간단히 얘기하면 선택과 집중이라 할 수 있다.
두 국가간 역량의 차이로 절대적인 우위를 가진 국가가 모든 면에서 유리할 수 있지만 열위의 국가가 특정 분야에 집중해서 발전시키면 서로에 이득이 된다는 것이다.
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도의 이론은 이른바 고전경제학이라 불리우며 19세기 열강의 수탈과 대공황으로 일반이론이 등장하기 전까지 경제학의 주류로 자리매김 했다.


보호무역과 자유무역

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도는 미시적인 부분에서 차이는 있을지언정 자유무역을 통한 자본주의 발전에는 일치된 견해를 보였다.
완전 시장경제에서 국가간의 교역은 이론적으로는 서로에게 윈윈이었지만 불행히도 현실세계는 그렇지않다.
사실, 자유무역이 자본주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지조차 이견이 갈린다.
국가 전체로 보면 이득이지만 특정 집단이나 소외 계층에서는 손해일 수 있고 그 손해분은 국가에서 충당해야 하는데 그런 사회복지 시스템이 당시에 거의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일반적으로 자유무역을 요구하는 나라는 경제력 뿐아니라 군사력이 뒷바침되는 경우가 대부분 이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19세기 영국은 증기기관 발명, 식민지의 자원과 값싼 노동력으로 생산성의 비약적 발전을 이룩했는데 그러한 자신감으로 전 세계에 자유무역을 주장하며 교역을 요구했다(서양 열강은 처음부터 전쟁을 하지 않았다. 교역을 요구했을 뿐이지..)
그런 영국조차도 자국 귀족의 토지생산물에 대한 이득을 보전해주기 위해 보호무역으로 대표되는 곡물법(Corn Laws)을 1846년까지 유지시켰다.
물론, 곡물법 폐지는 아일랜드 대기근같은 극심한 흉년과 인건비의 급증으로 당시 신흥 부르주아의 지속적인 요구와 귀족들의 반발이 그 배경이 되었지만 결국은 보호무역과 자유무역의 갈림길에서 선택의 문제였다.
세계 최강 영국은 빅토리아 여왕 치세에 해가지지 않는 제국의 위용을 보여주었고 그 요인들 가운데 하나가 자유무역이었다.
 

<로버트 필 수상을 자유무역으로 이끄는 콥덴>

 

사실 영국은 처음부터 자유무역을 설파한 나라가 아니었다. 아니 지독한 보호무역을 주창한 국가였다.
16~7세기 영국은 세계 최강국이 아니었다.
신대륙의 막대한 자원을 등에 입은 스페인과 선진기술은 물론이고 인종과 종교의 자유가 있는 네덜란드가 최강국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영국은 양모를 수출하는 농업국에 불과하다 어떻게 한세기를 지나면서 최강국으로 발돋움했을까?
헨리8세 이후 근대 국가의 기틀을 완성한 영국은 자국의 산업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양모의 수출입을 통제하기 시작하였고 선진기술을 습득하기 위한 치밀한 노력이 더해졌다.
서서히 산업화의 길을 걷게 되었고 태생적으로 강한 해군력을 기반한 해상권의 우위를 바탕으로 프랑스와 스페인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한세기 빠른 시민혁명 이후 최초의 수상체제를 구축하고 동인도회사로 대표되는 식민지와 무역을 일원화하는 체계를 구축하였으며 산업보호의 일환으로 관세정책을 추진했다.
자국의 불완전한 제조업을 보호하기 위해서 선진 공산품을 수입할때는 철저하게 관세를 부과해 자국의 제조업을 보호했으며 반대로 1차산업에 대해서는 관세를 완화하는 정책을 추진했는데 위에 언급한 곡물법 폐지가 그런 예라 할 수있다.
이러한 기조는 국부론이 쓰여질때까지 유지되었다.
그러한 제조업의 발전은 자국뿐 아니라 식민지와 경쟁국, 이제는 한 세기전 동경의 대상이었던 네덜란드와의 경쟁에서도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고 서서히 보호무역의 효용성에 대한 비판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 시점에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 나온것이다.


박정희의 경제정책

516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나름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일환으로 경제발전에 역점을 두었다.
집권이전까지는 자본이나 기반시설이 전무하다 시피했기 때문에 선진국으로 부터의 차관과 한일수교로 받은 일정 금액, 월남전 참전이 경제개발을 위한 종잣돈이었다.
박정희 집권전까지 한국은 가난한 농업국에 불과했다. 박정희는 1차산업 기반의 국가를 제조업 국가로 변화시키기 위한 발걸음을 내디뎠고 어느정도 가시적인 성과도 거두기 시작했다.
부정투표로 점철된 1971년 3선에 성공하고 경제개발계획을 실시되면서 조국의 근대화라는 기치아래 영구집권를 꿈꾸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자신의 최대 정적인 김대중을 납치하고 7.4남북공동성명 이면에 유신헌법개정을 착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신독재는 친일파 박정희의 전형적인 일제 잔재중 하나다. 정치,언론은 물론이고 정상국가라 할 수있는 국가를 감시와 통제를 기반으로하는 병영국가로 만들었다.
민주공화국은 머나먼 이상향이었고 친일의 더러운 잔재를 한국에 뿌리 내린 시기였으며 우리 근현대사의 지울수 없는 오점으로 남아있다.
박정희의 공과는 단순히 하나의 글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지금은 경제적인 관점에서만 보자.


1970년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시작으로 한국은 중화학 공업 기반의 제조업 국가로 서서히 변해갔다.
외국의 차관(일정 부분은 박정희의 수중으로 들어간)으로 조선소와 석유화학공업이 일어났으며 포항에는 제철소가 세워졌다.
이 시기는 위에서 설명한 헨리8세의 자국 제조업보호정책과 궤를 같이 한다.
일제시대의 적산/불하 자산으로 가업을 일으킨 삼성같은 대기업의 혜택을 법으로 보장했으며 철처한 보호무역으로 제조업을 보호했다.
경공업위주의 제조업이 70년대를 지나면서 중공업 분야도 북한을 앞서기 시작했다.
데이비드 리카드의 비교우위론에서 보면 가난한 나라와 부자 나라는 수입/수출품이 정해져있기 때문에 국가간 경제구조의 역전현상이 벌어질 가능성이 희박하다.

이런 산업구조를 바꾸기 위해서는 몇가지 선행되어야 하는데

첫째가 정부의 강력한 지원이고 둘째가 그러한 지원이 오래 지속되어야 하며 셋째는 당시의 시대상황이다.


헨리8세와 박정희를 비교해보자.

헨리8세는 교황과 맞짱뜨는 절대왕권을 가지고 있었고 죽을때까지 권력을 유지했다. 또한, 자신의 후계자는 영국의 몇 안되는 위대한 여왕이었다.
국가에서 체계적으로 지원할 수 있었고 산업화의 태동기로 어느 국가가 선두로 치고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시기였다.
박정희 역시 독재자로 죽을때까지 집권했으며(기간 산업은 단기간 완성되지 않는다) 당시 6~70년대는 냉전이 절정이었고 전 세계가 보호무역으로 무장한 시기였다.
한마디로 자국의 산업을 발전시킬수 있는 최후의 시기가 20세기 중후반이었고 과정이야 어떻든 박정희시대 이후로 한국의 산업구조는 바뀌었음이 분명하다.
419혁명 후 집권 민주당이 안정적으로 개혁을 추진했다면.. 역사에 가정은 필요없다지만 나는 부정적으로 본다.
박정희가 21세기에 환생해서 경제개발을 시도했어도 나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노무현시대의 한미FTA는 정책적인 호불호가 존재했지만 지금은 그러한 논란이 거의 없다.
애덤 스미스가 17세기 사람이었다면 국부론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당시의 시대상황은 그만큼 중요한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반론하는 사람은 있겠지만 1960~70년대 한국 경제발전을 두고 박정희 행적을 폄하하거나 배제하는건 맞지않다고 본다.

고전경제학의 태동부터 한국의 경제발전까지 대략의 흐름을 살펴봤다.
물론, 요즘 경제의 주요 화두인 신자유주의 재해석이나 부의 재분배, 노동문제는 또다른 조명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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